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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신경세포는 평상시 정상적으로 늘 전기를 띠며 뇌세포들 간의 미세한 전기신호를 형성하고 있다. 평상시의 이러한 전기적 질서가 깨지면, 뇌신경세포는 과도하게 흥분하거나 억제되어 몸 전체가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경련을 보이거나 의식을 잃게 된다. 이를 ‘뇌전증발작’ 이라고 하며, 고열이나 전해질 장애 등 뇌를 둘라싸고 있는 환경이 나빠지면 누구에게나 뇌전증발작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작은 환경변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뇌전증발작이 나타나거나, 별 다른 요인 없이도 두 번 이상 반복적으로 뇌전증발작이 생기면 ‘뇌전증 (腦電症, epilepsy)’이라 진단한다.    

- 에필리아, 「뇌전증 정의」

 

뇌전증(epilepsy)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외부에서 악령에 의해 영혼이 사로잡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하지만 근 ·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뇌전증발작은 뇌파 등의 의과학 기기나 신경생리학의 발달로 인해 신경세포의 일시적이고 불규칙적인 이상흥분현상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러한 현상을 억누르는 약물을 쓰거나 이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병소를 제거하면 증상의 완화와 치료가 가능한 병으로 간주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조절이 가능한 질병이고 일부에서는 완치를 기대할 수도 있는 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대한뇌전증학회, 「뇌전증이란」서론 중에서

 

예전에 서양의학사를 다룬 책을 읽던 중에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그림 하나가 있다. 서양 중세시대 삽화풍의 아주 엽기적인 그림이었다. 몸통도 없이 중년 남자의 얼굴과 머리만 달랑 있는 그림이었는데 그 위에 남자의 정수리를 뚫으려는 드릴 송곳이 같이 그려져 있었다. 책의 설명은 뇌전증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시대에 그 병을 무슨 귀신이나 악령이 깃든 저주처럼 생각해 머릿속에서 악하고 나쁜 기운을 쫓아내야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하면서 뇌전증이 귀신이 깃든 저주의 병이 아니라 사람 뇌의 전기적 이상신호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련발작을 억제하는 항경련제 약물과 측두엽절제술, 뇌량절제술, 미주신경자극술 같은 수술방법, 케톤식이요법 따위의 다양한 치료법이 나오고 있다. 이와 더불어 역사 속에서 삶의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뇌전증 환자였다고 알려졌다. 그들 중에 몇을 소개하면 이렇다.

 

알렉산더대왕 (B.C 356 ~ 323)|출처:위키백과

알렉산더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 Alexander III Magnus;B.C 356 ~ 323)

필리포스 2세와 에페이로스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 필립포스가 마케도니아왕국의 통합을 완수하여 그리스세계 제일의 군사국가로 급성장하였던 왕국의 번성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현실적이고 신중하며 과단성 있는 성격의 아버지와 광신적인 정념의 소유자인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3~16세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 받고 그의 영향으로 철학과 의학, 과학적 탐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특히 그때 읽은 《일리아드》는 전생애를 통해 그의 행동과 사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박트리아 여자와 결혼하고 장병 1만 명을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시켰으며, 동방인을 주축으로 한 신제국군의 편성 등의 조처를 취한 그의 의도는 동방 각지에서의 도시건설, 그리스용병의 식민정주책과 함께 신제국의 기초를 동서의 협조와 융합에서 찾으려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그리스의 각 도시에 요청하여 자신을 신으로서 숭배하게 했던 일은 뒤에 헬레니즘적인 군주예배(君主禮拜)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BC 334년부터 동방원정을 시작하여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제국을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에 이르는 광대한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다. 동방에 이은 아라비아반도 항해나 서지중해의 원정계획은 BC 323년 32세 때 바빌론에서 맞이한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내치(內治)와 외정(外征)을 끝맺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동방원정과 대제국 건설을 계기로 동·서양의 활발한 문물교류가 이루어 졌고 로마제국 건설까지의 300년에 걸친 헬레니즘세계가 형성되었다. 【에필리아, 일부발췌】

 

소크라테스 (B.C 470 ~ 399)|출처:위키백과

소크라테스 (Socrates; B.C 469 ~ 399)

고대그리스의 철학자로 아테네 출생이다. 그의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석조가(石彫家)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술(産婆術)에 능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코는 짜부러진 사자코로 용모가 매우 추했다고 한다. 어린시절부터 <다이몬(禁止)의 소리>를 듣고, 자주 깊은 몰아상태를 경험하는 <신들린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년에는 후대에 악처로 유명했던 크산티페와 결혼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철학자와는 달리 자연 법칙이나 우주에 대해 더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관심을 인간 자신과 자신의 근원에로 돌려 자기 자신의 '혼(魂:psych )'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여, 아테네의 거리와 시장·체육관 등에서 대화와 문답을 하면서 지냈다. 그는 책도 쓰지 않았다.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티프론(Euthyphron)》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의 평정청랑(平靜淸朗)한 그의 태도는 중대사에 직면한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에필리아, 일부발췌】

 

빈센트 반 고흐 (1853 ~ 1890)|출처:위키백과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1853 ~ 1890)

1853년 3월 30일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인 반 고흐는 네덜란드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의 목사관에서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그는 시골 들판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했고 16세 때 숙부가 일하고 있는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수습사원으로 들어간 것이 그의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화랑에서의 일은 날마다 예술 작품과 접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곧 렘브란트와 할스를 비롯한 네덜란드 화가들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한 화가는 당시 작품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였고 평생 이 두 화가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23세 때 구필 상회에서 해고되고 1877년 네덜란드의 도르트레흐트에서 책방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책방점원으로 일하면서 신앙심이 한층 돈독해져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성직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정통교리의 접근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여 교회 당국과 잇따라 충돌을 일으켰고 3개월의 연수기간이 끝난 뒤 복음전도사로 임명을 받지 못하자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의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러 떠났다. 1879~80년 겨울 이곳에서 그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선교활동을 그만두어야 했고 처음으로 커다란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27세 때(1880년) 드디어 자신의 천직을 발견했다. 반 고흐는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창조력을 깨달으면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반 고흐는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몇 주일 뒤, 그는 다시 간질로 인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고흐는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 '알피유 가족', 의사들의 초상화,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에필리아, 일부발췌】

 

알프레드 노벨 (1833 ~ 1896)|출처:위키백과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 (Nobel. Alfred Bernhard, 1833 ~ 1896)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이마누엘 노벨과 카롤리나 노벨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이마누엘은 발명가이자 공학자로 원래 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알프레드와 3명의 남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렸을 때 죽었다.

어린 시절의 알프레드는 간질로 인해 병약한 편이었으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보였으며 특히 폭탄에 관심이 많아 아버지로부터 공학의 기초를 배웠다. 한편 사업에 실패한 그의 아버지는 1837년 광산 발파용 폭탄과 공작기계를 제작해 성공하여 아들에게 개인 가정교사를 붙여줄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를 회복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알프레드는 이미 16세에 유능한 화학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어는 물론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에도 능통하게 된다.

1864년 노벨의 니트로글리세린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는 막내동생 에밀을 포함해 여러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노벨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니트로글리세린을 투과성이 높은 규산이 함유된 규조토에 스며들게 해 말리면 사용과 취급이 훨씬 용이하고 편리하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이 새 제품에 다이너마이트('힘'을 뜻하는 그리스어 디나미스에서 따온 말)라는 이름을 붙여 영국(1867)과 미국(1868)에서 특허를 받았다.

노벨의 성격은 좋지만은 않았다. 노벨의 복잡한 성격은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업 때문에 거의 1년 365일을 여행을 하면서 보내야 했지만, 노벨은 가끔씩 우울증에 시달리는 고독한 은둔자였다. 그는 남의 말을 들어주는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지가 번득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연애보다는 발명을 더 좋아해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문학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희곡과 소설, 시를 썼으나 출간은 하지 않았다. 노벨은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에다 자신이 발명한 폭탄들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하기를 바랐으나, 인류와 국가들에 대한 견해는 비관적이었다.

노벨은 1895년까지 협심증으로 고생하다가 그 다음해인 1896년 12월 10일 이탈리아 산레모에 있는 별장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가 1895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작성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해두었던 유언장에서 노벨은 인도주의와 과학의 정신을 표방하는 자선사업에 늘 아낌없는 지원을 했으며, 재산의 대부분을 기금으로 남겨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인정 받고 있는 노벨상을 제정했다. 【에필리아, 일부발췌】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1840 ~ 1893)|출처:위키백과

페테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Pyotrll'ich Chaikovskii, 1840 ~ 1893)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광산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의 총감독이었으며 그의 가족관계로는 위로 이복누이와 형 또 아래에 누이동생과 동생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유년 시대를 보냈다. 그는 어려서 가정교사에게 불어와 독어를 배웠는데 그는 그녀를 잘 이해하고 따라서 그녀와의 이별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이별의 충격은 페테르스부르크의 법률학교 기숙사 생활에서 더욱 견딜 수 없게 하였다.

1848년 콜레라로 어머니가 죽은 뒤 작곡을 시작하였고 감정의 배출구로 음악을 쓰는 습관이 몸에 붙이게 되었다.

그의 작품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면 약 40년간에 걸친 창작활동 중에는 시민세대의 음악의 기점(基點)과 종말이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악파의 중요한 일익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법상 피아노 ·바이올린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였음은 물론, 이것이 고전적인 작풍과 서로 작용하여 그의 음악에 신선하고 쉬운 영상(影像)을 심어줌으로써 차이코프스키음악의 독특한 매력을 지탱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는 표제음악적(標題音樂的)인 색채가 짙다. 무대음악은 별도로 하더라도, 교향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표제적인 의도를 포함하고 있어 사상성이 매우 강하다. 특히 교향시 《만프레드 교향곡:Manfred Symphony)》(1885)은 문학적 사고가 깊은 작품으로 유명하며, 그의 오페라 가운데서도 푸슈킨의 원작을 대본으로 한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파의 역사주의와는 반대로 동시대의 증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1854년 14세 때의 《왈츠》에서 시작하여 1893년에 완성된 교향곡 제6번 《비창》(작품 74)으로 끝났다. 작품 74는 자신이 붙인 번호이고, 그 후의 보주(補註)로 80, 이 밖에 번호 없는 초기의 소품이 약 20곡 현존한다. 즉 교향곡 6곡, 미완성의 교향곡 1곡, 교향시 1곡, 오페라 11곡, 발레곡 3곡 이외에도 다수의 실내악곡 ·피아노곡 ·가곡 및 협주곡 등이 있다. 【에필리아, 일부발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69 ~ 1821)|출처:위키백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1769 ~ 1821)

나폴레옹(1769∼1821)은 코르시카섬에서 가난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92년 반혁명군과 영국 함대가 점령한 툴롱항의 공방전에서 지휘관으로 눈부신 공을 세우고 일약 육군 소장이 되었다. 96년에 바라스의 정부(情婦)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조세핀과 결혼하고,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면서 군사적, 정치적 야망을 품게 된다.

"내 사전엔 불가능이란 없다!" 등의 명언으로 유명한 나폴레옹은 어려서 간질로 고생을 많이 했다. 하루 3시간만 잔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비서 브리센에 의하면 건강에 항상 신경을 써서 하루 8시간은 잤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천재이며, 책략에 뛰어난 영웅이었다. 잇따른 전쟁을 통해 전세계에 용맹을 떨쳤으나 워털루 싸움에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 후 대서양의 세인 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가 1821년 5월 5일 숨을 거두었다. 【에필리아, 일부발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1821 ~ 1881)|출처:위키백과

표트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kikailovich Dostoevskii, 1821 ~ 1881)

표트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0월 30일 모스크바의 말린스키 시립병원의 의사 미하일 도스토예프스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몹시 화를 잘 내며 까다로운 성격의 아버지와 신앙심이 돈독하고 아이들에게 다정한 애정을 쏟는 어머니 슬하에서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16세 때 아버지가 영지의 농노에게 살해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에 W. 셰익스피어·J.B. 라신·J.C.F. 실러·E.T.A. 호프만·H. 발자크 등 서구문학을 탐독하였다. 이 당시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을 발표하였는데 이 처녀작이 비평가 V.G. 벨린스키의 격찬을 받아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이어서 《분신(分身, 1846)》 《여주인(女主人, 1847)》 《백야(白夜, 1848)》 등 몽상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다.

1847년경부터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집단 <페트라셰프스키회(會)>에 참가하여 벨린스키가 N.V. 고골리에게 보낸, 러시아정교회를 비판한 편지를 낭독한 것이 주요 죄상(罪狀)이되어 동년 12월 총살형을 언도 받았지만, 집행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4년의 징역형과 그 후의 병역의무로 감형되었다. 이 <모의사형(模擬死刑)>의 체험은 《백치(白痴, 1868)》에 생생하게 씌어져 있다. 시베리아의 옴스크에서 복역했는데, 그 체험에 관해서는 《죽음의 집의 기록(1862)》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이 무렵 간질 발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66년 《죄와 벌》을 발표, 문명(文名)을 떨쳤다. 75년 《미성년》을 발표하고 76년부터 월간 개인잡지 《작가일기》를 발행하였다.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Bratya Karamazovy, 1879∼80)》과 《작가일기》로 <국민의 교도자(敎導者)>라는 위치에 섰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農奴制的)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諸關係)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에필리아, 일부발췌】

 

▣ 자료출처|

- 에필리아 https://www.epilia.net/

- 대한뇌전증학회 http://www.kes.or.kr/

- PD JOURNAL 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59436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C%84%ED%82%A4%EB%B0%B1%EA%B3%BC:%EB%8C%80%EB%AC%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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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 (EPILEPSY)|출처:Pixabay

 

간질, 뗑깡, 지랄병

간질 (癇疾), 뗑깡 (てんかん, 癲癇), 지랄병이라고 부르는 뇌전증(EPILEPSY)은 어떤 병일까? 내가 아는 상식 선에서 간단히 설명한다면 '뇌에 전기적 이상신호로 뇌 전체가 일시적으로 마비되면서 경련발작을 일으키는 병'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나는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처음 경련발작을 일으켰다. 집에서 아침 운동을 하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학교에서 같은 반 짝꿍이 알려준 다리 운동을 해보려다가 그랬다. 내가 다시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안방에 누워 있었고 어머니가 옆에서 아주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후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엎드려 자다가 쓰러지기도 했고 대학도서관에서도, MT에서도 경련발작으로 쓰러졌다.

 

경련 후유증은 두통, 구토감

경련발작으로 의식을 잃고 한참 후에 일어나면 나는 심한 두통과 구토감에 시달렸다. 발작 일으킨 그날 하루는 계속 잠을 자는 게 가장 좋은 처방이었던 거 같다. 그렇게 하루를 충분히 자고 나면 다음날은 후유증 없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어머니는 내가 발작으로 쓰러지면 청심환(씹는 거든, 마시는 거든 상관없이)을 먹이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정말 효과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위약효과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내게 주신 청심환을 먹고 나는 발작 당일 하루 온종일 잠을 청했다.

 

두통과 구토감이란 후유증이 처음 발작 때부터 같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흐릿하다. 아침운동 하다 쓰러진 첫 발작 때는 의식을 회복하고 잠시 있다가 뉘늦게라도 학교에 갔던 기억이 있다.

 

기억나는 약 이름... '디란친'

내가 뇌전증으로 처음 병원을 간 게 대학을 휴학하고 나서 일로 생각된다. 대학 일 년을 다니고 등록금 마련이 안 되어서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군병역신체검사' 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다. 집이 시끄러워진 건 신체검사를 받고 입영통지문이 다시 배달되고 나서였다.

 

'군병역신체검사'를 받기 전 경련발작 때문에 병무청에 문의를 했지만 '그냥 검사 받으러 가도 그쪽에서 알아서 해줄 것'이란 말만 믿고 갔다가 1급판정을 받았다. 경련발작 때문에 군의관을 따로 만났지만 대기중인 다른 신검대상자들을 보니 모두가 갈색봉투에 담긴 의료진단서 한 부씩을 들고 있었다. 신체검사 인솔장교가 검진건물 뒤켠에서 대상자들 엉덩이를 까게 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이상이 있나 없나 대충 훑어보던 경험도 있다.

 

입영통지문을 받고 놀란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지역병무청을 찾아가 언쟁을 벌이고 국방부장관 이름으로 수차례의 민원을 보내는 소동이 일어났다. 겨우 재검 인정을 받았지만 그 후의 일도 순탄치 않았다. 서울로 올라가서 하룻밤을 자고 검사 받으러 간 다음날 아침에 발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구급차량에 실려 응급으로 병원에 갔다. 

 

뇌파검사를 했지만 의사는 오랫동안 관찰해 온 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상당히 보수적인 의료진단서를 작성해 줬다. 군병역 재검사에서 만난 군의관은 서류부족을 이유로 재검판정을 내렸다. 휴학중이던 나에게 다시 대학교수님이 인우보증서를 써주시고 같은 과 예비역 형들이 나서서 내 발작 목격담을 민원으로 써주면서 겨우 현역병에서 벗어난 군 면제 판정을 받았다.

 

내가 뇌전증으로 처음 먹은 약은 '디란친'이었던 거 같다. 흰색의 캡슐약이었는데 가장 오래 먹었던 약이고 그 때는 의약분업 전이라 병원에서 준 약이 떨어지면 약국에서 내가 직접 가서 사왔던 경험 때문인지 아직도 이 약 이름은 기억에 있다.

 

'너는 간질이 아니야...' 그리고 한약, 월계수 열매

나는 아기였을 때 경기가 심했다고 한다. 경기를 심하게 자주 해서 어머니가 밤에 동네 약국문을 두드리기 일쑤였고 공연장에서 큰소리로 나오는 음악에 깜짝 깜짝 놀라서 경기를 하곤 했다고 한다.

 

내가 처음 뇌전증 발작을 하고 나서 어머닌 좀처럼 내 병을 인정하지 못하셨던 거 같다. '간질'에 대한 부정적 시선 때문인지 몰라도 '간질'이란 말 자체를 입에서 꺼내는 걸 극도로 꺼리셨다. 없는 돈에 뇌전증 때문에 나를 데리고 한약방에 가셨을 때도 그랬다. '간질'이란 얘기 대신 경련발작을 자주 해서 데려왔다고 하셨던 거 같다. 한의사가 나를 진료하고 약을 지어 집에 왔지만 나는 그 이후에도 경련발작을 일으켰다.

 

한동안 월계수 열매를 달여 먹은 적도 있다. 어머니가 '월계수 열매가 혈액순환에 좋다'는 말을 들으시고 때마다 월계수 열매를 사오셔서 내가 장복하게 했다. 그 때 월계수 열매라는 걸 처음 보았는데 원래 동그랗고 단단한 열매를 생강편처럼 얇게 자른 거였다. 솥에 월계수 열매 썰은 거를 일정 양 넣고 물을 부어 달이면 진한 팥물색으로 변했다. 식후에 한 잔씩 마셨는데 아무 맛도 안 나고 아주 강한 쓴맛만 느껴졌다.

 

컴퓨터의 '블루스크린'과 닮았다

뇌전증 발작으로 의식을 잃게 되면 쓰러지기 직전의 약간의 기억 뿐, 정작 나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정신이 들고 나서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음식을 삼키면 토할 것 같은 울렁거림과 메슥거림, 경련발작으로 인한 약간의 근육통과 찰과상 등으로 경련발작의 고통을 느낀다.

 

오히려 경련발작을 목격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더 놀라는 거 같다. 의식을 깨고 나면 혼이 나간 듯한 걱정스런 표정의 어머니를 자주 보곤 했다. 내 경련발작을 옆에서 목격했던 한 친구는 무서웠다는 솔직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다. 몸이 뻣뻣해지면서 눈동자가 돌아가고 입안에서 침이 흘러나오는...

 

예전에 인터넷 한 커뮤니티에 간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네티즌이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뇌전증 환자의 경련발작을 처음 보고 무서웠다는 감정을 좀 격하게 표현해서 토로하는 글이었다. 그 바람에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하냐'며 핀잔을 하는 댓글도 여러 개 달려 있었다. 같은 뇌전증 환자로서 간호사라는 그녀의 글에 섭섭한 감정도 들었지만 가족들과 친구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남규리라는 배우가 예전에 가수로 활동할 때 있던 그룹 '씨야'의 무대공연 영상을 본 적도 있다. 씨야 뒤에서 함께 춤을 추는 여성 댄서 한 명이 공연중에 갑자기 쓰러져서 발작을 일으키자 동료 댄서와 공연스태프(staff)가 팔다리를 한 쪽씩 붙잡고 황급히 무대 뒤로 사라지는 장면이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뇌전증이 뭐냐'고 묻는다면 컴퓨터의 블루스크린 증상을 비유하는 게 제일 설명하기 쉬울 거 같다. 사람의 뇌는 평소 전기적 신호를 주고 받는다고 한다.(사람의 뇌파검사라는 게 아마도 이 전기적 신호를 증폭해서 검사하는 방법일 거다.) 이 중에 간질파가 발생하면 뇌전체에 과흥분이 생겨서 신체에 일시적 마비증세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뇌전증 발작기제(機制)라고 알고 있다. 컴퓨터의 블루스크린(BlueScreen)도 컴퓨터 하드웨어 또는 소프트웨어상 여러가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시스템 에러가 생겨서 갑자기 정상작동을 멈추는 현상이다. 일종의 컴퓨터가 일으키는 '마비증상'인 셈이다.

 

환자 본인이 뇌전증을 잘 이해해야 한다

나는 뇌전증에 대해서 오랜 시간 제대로 자각을 못했던 거 같다. 나 자신이 뇌전증 환자이지만 이 병을 잘 알지 못했고 처음 '디란친' 약을 먹을 때에도 약의 복용량과 시간을 철저히 지키면서 먹지 못했다. 가족들이 나를 '아픈 사람' 취급할 때 나도 그 시선을 오랜 시간 그대로 인정하면서 살았던 거 같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환자 스스로 자신이 지닌 뇌전증이란 병에 대해 잘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한 거 같다. 모든 병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자신의 병을 잘 알아야 그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지 않을까?

 

뇌전증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일도 중요한 거 같다. 내 경험으로 보면 내가 뇌전증환자라는 사실을 밝히면 크게 두 가지 태도를 보이는 거 같다. 친구나 지인들의 경우는  '괜찮아. 요새 멀쩡한 사람이 어딨어? 누구나 한두 군데 다 아픈 구석이 있지!'라고 나를 지지해주는 척을 하지만 속으로는 당황한다. 취업을 위해 면접을 보는 경우 '글쎄... 간질발작을 하는 사람을 채용해도 될까?'하는 사장님의 의구심과 난처해 하는 표정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 둘다 머릿 속에 어떤 강렬한 경련발작의 전형적인 이미지만 들어있을 뿐 실제 뇌전증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을 공산이 크다. 이런 경험을 한 두번 겪다 보면 타인을 제대로 이해시키기도 어려운 얘기를 점점 꺼내지 않게 된다.

 

나도 처음엔 용기를 내서 꺼내던 얘기를 점점 하지 않게 되었다. 그치만 돌이켜보면 내가 가진 뇌전증을 나 스스로 잘 알지 못했던 부분도 있고 타인에게 병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지식과 노력은 부족한 채 어설픈 언변과 막연한 자신감으로 나를 애써 포장했던 부분도 있던 거 같다.

 

미국 정부의 개인정보불법수집을 폭로한 CIA · NSA 정보분석원 '에드워드 스노든' 의 실화를 영화화한 2016년작 《SNOWDEN》 한국포스터, 영화에서 뇌전증 질환을 앓고 있는 스노든의 모습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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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의아빠 2020.01.18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는 뇌전증환자들에 대하여 의료지원도 부족하고 편견이 심합니다.
    치매에 1조 쓰면서...뇌전증에 300억만 써도 정확한진단과 처방을 할수 있을텐데..